요즘 2MB의 한반도 대운하 문제로 떠들썩하다... 아니라는걸 알면서 도데체 왜들 그러는 것인지..ㅡㅡ; 이 땅이 대통령의 땅은 아니지 않은가? 대통령은 눈가리고 아웅하고 있고, 배운사람들이라는 측근 학자님네들은 곡학아세하고 있고... 세상 참 지X이다... 2MB야~ 국민투표라도 함 붙여보자.. ㅡㅡ;
한국 블로거 연합 이라는 요상한 단체가 등장했다. 1천만 블로거의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고, 블로거들의 권익을 도모하겠다는데... 발기인이라는 13명이 가관이다. 자칭, 블로거 연합 대표라는 작자들이, 그 흔한 블로그 주소도 없다... 이 인간들이 블로거이기는 한걸까?.. 도데체 누가 지들보고, 블로거들의 대표가 되달라했을까? 블로그 하는 사람은 전부 블로거인데, 그럼, 전국 4500만 인구가 모두 블로그를 갖게 되면, 전국민 대표인가?... 사전에 그런 연합을 만들고자 하는 홍보도 없었다. 일단 발기(?)하고, 언론에 알리는 게 자칭 '한국블로거연합' 이라는 단체의 홍보방식인가?
사람사이에, 도리라는게 있고, 예의가 있다. 꼴린다고 아무때나 내지르면, 그것은 범죄와 다름 아니다. 그런면에서, 꼴린다고 다짜고짜 내지른 저 13인은 사회의 양아치일뿐... 저 13인들 트랙백은 할 줄 알까?..
뭐, 뉴스를 보니, 단지 친목단체일 뿐이라고 했던데... 친목단체가, 왠 한국블로거연합?.. 그럼 한국은행은 은행들의 친목단체인가? 이건뭐, 어서 듣지도 보지도 못한 나이만 처드신 양반들이, 대선을 기회로 해서, 권력의 한축에 빌붙고 싶었던 거다...
경기도 신설 외고들의 입시 문제 유출 사건으로 세간이 한바탕 시끄럽다. 또 연세대학교의 학장 부인 사건에서 시작된 편입학 부정 수사도 유명 사립대학들로 확대될 조짐이다. 해당 사건으로 피해를 입거나 수상 대상이 된 학생들은 어른들의 잘못으로 자신들이 희생되는 것은 부당하다며 선처를 호소하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그러한 항변에 대해 또 다시 온정주의를 들이대 유야무야하는 것은 절대로 반대이다. 잘난 부모를 둔 덕은 봐도 되고, 못된 부모를 둔 탓은 보면 안 된다는 식의 온정주의는 이 사회에서 영원히 사라져야 한다. 특히 위의 사건들에서 만큼은 '자식이 무슨 죄?'라는 말을 적용할 수 없다. 외고 문제 유출로 불합격한 학생들의 경우, 학생들 스스로가 입시 학원의 부정을 어렴풋이라도 알고 있으면서도 침묵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피해를 감수하고 사건을 폭로한 용감한 중학생의 모습은 모른 척하고 있던 나머지 동급생들을 부끄럽게 만들기에 충분할 것이다. 편입 부정의 경우는 더더욱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은 이미 성인이다. 부모가 자식의 편입을 위해 뒷돈을 주거가 줄을 대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고 봐야 한다. 그들은 공범일 뿐이며, 몰랐다고 변명한다면 자신의 안위를 위해 부모를 팔고 있는 것일 뿐이다.
영화 '우아한 세계'의 남자 주인공 강인구는 폭력조직의 중간 보스이다. 그의 아내는 조직폭력배인 남편을 늘 못마땅해 하면서 그만두라고 한다. 그의 딸은 심지어 자기 아버지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글까지 일기에 남긴다. 그런데 자기의 남편과 아버지가 하는 행동을 싫어하고 역겨워 하면서도, 결국 그 남편이자 아버지가 핏값과 죄값으로 번 돈으로 좋은 집을 사고 유학을 가며 우아한 세계에 편입된다. 영화 '우아한 세계'는 여러 가지 풍자를 담고 있는 영화이고 그래서 물론 다양한 시각으로 해석될 수 있다. 아내와 자식 뒷바라지에 등골이 휘는 아버지와 남편들은 남편과 아버지의 억울한 희생으로 지탱되는 '우아한 세계'에 주목하고 싶을 것이다. 밖에서는 온갖 악한 짓을 하면서도 집에서는 힘 없고 평범하고 온순한 가장으로 살아가며 우아한 세계를 이끄는 한 남자의 이중적인 모습에 주목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영화를 통해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꿈꾸는 '우아한 세계'의 허구성과 방법적 사악함에 대해 주목해 본다. 우아한 세계에 살기 위한 목적을 위해,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대한민국의 군상들이 빠진 도덕적 혼돈과 무책임 말이다.
그런데 사실 그 어떤 위대한 목적도 수단을 정당화시킬 수는 없다. 어떤 사람에게는 수단이라 여겨지는 것들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목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양심과 도덕과 책임의 문제에서 생각해 본다면 수단과 과정이라는 것은 없으며 모두가 목적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쓴다는 말은 애시당초 언어도단이다. 개처럼 번 돈은 이미 개의 돈이지 정승의 돈이 아니기 때문이다. 개처럼 얻은 부와 권력으로 우아한 세계의 정승처럼 살아간다면, 그 자체로 죄악이고 위선일 뿐임을 영화 우아한 세계는 잘 보여준다. 그러므로 잘못된 수단으로 이룬 우아한 세계는 사실은 추악한 세계일 뿐이다. 외고 문제 유출 사건으로 합격 취소 처분을 받은 어느 학생은, 방송 인터뷰에서 '저희는 정말 열심히 공부했어요. 그저 합격만을 위해 최선을 다 한 것 뿐이예요. 어른들의 그런 행동이 정말이지 치사하고 더러워요.'라고 말했다. 그렇다 참으로 더럽고 치사한 어른들의 욕심이다. 하지만 그것이 더럽고 치사한 일인 줄 알고 있으니, 그런 부정한 수단으로 얻은 성과를 스스로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는 것이 바른 자세이다. 자신들은 몰랐으니 불합격 처분은 부당하다고 말하는 것이야 말로 올바른 자세가 아닌 것이다.
우리 사회는 연좌제를 헌법으로 금하고 있다. 과거 수 천 년 동안 연좌제라는 올가미는 우리 사회의 합리적 발전을 가로막는 적이었다. 천민 신분의 어머니를 둔 허균과 홍길동은 자신의 능력과는 관계 없이 출세할 수도 호부호형(呼父呼兄)할 수도 없었다. 대역죄인의 집안은 삼족을 멸하였으며, 그 후손들의 출세길도 모두 막혔다. 월북한 아버지를 둔 작가 이문열은 평생의 삶을 자기검열 속에 가두어 두어야 했다. 하지만 이제 연좌제는 사회가 허용하지 않는 악습이 되었다. 범죄자나 범법자 가족을 두었다고 해서 다른 가족들이 같이 처벌받거나 불이익을 당하는 일은 더 이상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금해야 할 것은 법적인 연좌제일 뿐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의 불행은 사람들이 '마음의 연좌' 혹은 '반성의 연좌'까지 모두 연좌제 금지의 대상이라 착각하고 있는 데서 시작된다. 게다가 더 나아가서 '과실의 연좌'를 통해 죄로 얻어진 결실에 대해 죄의식 없이 누리고 차지하려 하는 추악함이 발생하고 있다. 대다수 복일매국노들의 후손들은 왜 비난을 당해야 하는가? 그들의 부모나 조상이 복일매국노이기 때문이 아니다. 자기 가족이 저지른 복일매국 행위에 대해 마음으로의 '죄값의 연좌'를 그들이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반성이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않으며 오히려 그 더러운 재물로 호의호식하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우리 사회가 혼란과 도덕성 망각, 책임감 상실로 고통받고 있는 것은 이러한 '책임의 연좌'가 상실되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지난 몇 년 간 전 국민의 절반이 부동산 투기의 행렬에 동참하였었다. 대통령과 정부에서 투기는 범죄이고 조금만 참으면 집값이 안정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절반 이상의 국민들은 준법과 양심을 거부하고 투기꾼이 되었다. 그러다가 결국 큰 손들의 돈지랄을 당해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그 때부터 그 투기 동참자들은 갑자기 피해자가 되고 선량한 시민이 되어 정부를 향해 억울함을 호소하며 손가락질을 하기 시작했다. 카드 대란 사건도 마찬가지이다. 너도 나도 카드로 신용 대출을 받고 대책 없이 소비하다가 문제가 터지자, 그제야 카드 발급을 장려한 정부가 신용불량자 양산의 주범이라며 적반하장의 태도를 보인 것이 일반 국민들이었다. 공약 없는 정치, 흠집내기와 막무가내를 일삼는 정치인들을 비난하지만 결국 그러한 정치와 정치인을 만들어 낸 괴물은 바로 우리들 자신이 아니었던가 말이다. 잃어버린 10년을 말하고 싶고, 양심과 정의가 무너져 버린 대한민국의 위기를 말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먼저 우리 자신의 책임부터 따져보아야 옳지 않은가? 질서와 룰이 사라진 부패 공화국 대한민국, 꿈과 희망이 사라진 대한민국, 건전한 정책의 토론이 사라진 대한민국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한국인은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당신은 국가과 민족에 대한 근심으로 밤을 지새워 본 적이 있는가? 당신은 건강하고 정직한 대한민국을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슬픈 일이지만 그런 국민이 많지 않다는 것이 진실일 것이고 그래서 대한민국은 지금 슬픈 위기에 처한 것이다. 투표율과 득표율을 감안해 보았을 때, 노무현 대통령이 2002년 대선에서 얻은 지지는 30% 전후라고 보면 맞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지지율은 꾸준히 유지되어 왔다. 그런데 지난 5년 간 나는 많은 사람들의 거짓말과 위선을 목도하였다. 정작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하지도 않은 자들이, 혹은 투표조차 하지 않은 자들이 자신이 노무현을 선출한 것을 후회한다는 거짓말과 유언비어를 터뜨리는 행위를 나는 참으로 많이 보아왔다. 진정성을 갖고 노무현에게 표를 던진 대부분의 유권자들은 지난 5년 간 비판적 지지자로서 노무현 대통령의 성공을 바랐고 책임감을 견지해 왔다. 부동산 투기와 주식(펀드) 광풍, 바다이야기 같은 사행 도박에 가장 열심히 참여하고 한탕을 노리던 자들, 또는 실제로 한탕을 건진 자들이 경제와 도덕의 위기를 떠들고 서민의 몰락을 말하는 것을 바라보며 나는 도대체 대한민국 사회의 뻔뻔함과 위선이 어디까지인지 궁금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대한민국 사회 구석구석 아무리 샅샅이 뒤져보아 '우아한' 구석은 별로 없고, 썩지 않은 구석이 없더란 말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또 무엇이 맞고 틀린지를 아는 것은 숙지(熟知)와 무지(無知)의 문제이다. 그러나 그러한 앎이 현실의 세계에서 행동으로 드러나는가 하는 문제는 책임(責任)과 무책임(無責任)의 영역에 속한다. 숙지가 책임으로 이어지고 무지가 무책임으로 이어진다는 도식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살아오면서 배웠다. 정의와 양심에 대해 책임을 가진 무지인은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정의와 양심을 갖춘 숙지인에게 무엇이 맞는 것인지 묻고 실천한다. 지금 우리 사회의 싸움은 좌파와 우파의 싸움이 아니며, 진보와 보수의 싸움도 아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진정한 대립각은 책임감(양심) 있는 자들과 책임감(양심) 없는 자들의 싸움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숙지하고 있는 무책임한 사람들이 지배층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무지하고 무책임한 사람들을 부추겨 거짓 선동을 일삼으며 권력과 부를 유지하고 있다. 각 개개인의 사정을 떠나, 55세 이상의 중, 장년 층 상당수가 정치적 비난을 받아 마땅한 이유는 그들 대부분이 보수우파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 대부분이 무지와 무책임으로 무장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래는 그들의 것이 아니며 더 젊은 세대들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고집스런 무지와 비뚤어진 무책임으로 인해 그들의 자식들은 엄청난 고통을 당하고 있으며 또 불안한 미래로 두려움에 떨어야 한다.
그들의 무지와 무책임으로 인해 숙지하고 있으면서도 무책임한 자들의 기만과 사기와 착취와 부패는 유지되고 있으며 단죄되지 못하고 있다. 나는 이제 좌파나 진보라는 말이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진정성을 상실했음을 알고 있다. 노동자(프롤레타리아)가 주인 되는 세상은 인류 역사에서 단 한 번도 없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민주노동당은 여전히 낡은 구호와 헛된 망상을 부추기고 있다. 지난 몇 년 간의 민주노동당의 무책임한 선동은 귀족노동자나 조폭노조 같은 또 다른 계층을 탄생시켰을 뿐이며 양극화 해소나 서민 생활 개선, 비정규직 문제에 있어 원론적인 대안 제시 조차 못하였다. 요컨데, 대한민국 사회에서 좌파나 진보는 희생이나 양보, 책임과 양심을 대변하는 말이 아니라 '무능력하고 게을러도 잘 살수 있는 권리'를 외치는 단어로 변질되었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보나 좌파를 자부하는 세력들 역시 보수나 우파를 자부하는 사람들 못지 않게, 이 사회의 혼탁과 부패에 대해 '죄악의 연좌'를 통감해야 하는 것이다. 이제부터 시작될 우리 사회의 싸움은 아마도 책임과 무책임, 즉 양심과 비양심의 싸움이 될 것이다.
물론 숙지하고 책임을 갖춘 사람이라면 진보나 좌파가 될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적어도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라면 보수나 우파가 되어도 사회에는 해악이 되지 않을 것이다. 유력한 대선 후보가 도덕성 시비에 휘말려 대선 정국이 어지럽다. 그런데 정작 후보 자신은 그 사건과 논란에서 한 발 비켜나 민생 장정이라는 우아한 세계에만 머무르고 있다. 그러나 후보 자신이 정말로 우아한 세계에 머무르고 싶다면, 추잡한 세계로 돌아와서 자기 자신은 그곳에 발을 담은 적이 없다는 것을 명명백백하게 밝힐 수 있어야 한다. 강인구가 아무리 좋은 집에 살고, 자식들을 훌륭하게 키워내더라도 그가 폭력조직에 몸 담고 타인의 핏값으로 부를 얻었다는 진실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과거와 도덕성에 대해서는 침묵과 변명으로 일관하며 오직 우아한 세계만을 말하는 후보는 대통령이 될 자격이 없는 것이며, 그렇게 도덕성을 상실하고 법을 지키지 않은 자가 대통령이 되어 이룬 성장과 발전은 결코 우아한 세계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두타스님은 저렇게, 길거리에서, 시주를 받아, 그 돈으로, 무료급식을 만들어, 노숙자들을 먹이신다고 한다... 그런 분의 머리에 손을 얹고 모욕을 하는, 저 개신교인은 머냐?.. 경악을 금할 수 없는 사진이다.... 누가 사탄이고, 누가 하나님인가?... 십자가를 들고 있는 저 개독에게 묻고 싶다.. 어려운 사람을 위해 진실로 봉사한 적이 있냐고...
거꾸로 가고 있는 이 땅의 개독들.... 바로, 그들이 악마일거다...
정말 반성해라... 이 땅의 개독들은 정말 반성해야 한다...
간디가 이런말을 했었다..
"나는 예수를 존경한다. 그러나, 크리스쳔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예수를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말 맞는 말 아닌가.. 나도 카톨릭 신자로써, 주님을 믿는다... 하지만, 이런 개독들은, 좋아할 수가 없다. 그들은 주님을 닮지 않았으니까...
인간 행동을 지배하는 무의식의 세계를 탐구하여 우리들에게 보여준 분은 바로 프로이트(Freud)였다. 나는 최근 년 최근 월 (가장 가까운 해 또는 가장 가까운 달)에 우리 사회에서 발생했던 사건들을 지배하고 있는 "심리적 기제가 무엇인가"하고 생각해 보게 됐다. 그 결과 나는 우리 사회에는 "조공의 심리가 작용하고 있다" (The psychology of tribute is at work)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아주 멀리는 1천 여 년, 아주 가까이는 100년 이 나라는 때로 왕조가 때로는 민족이 살기 위하여 인근 강대국들에 조공을 바쳐왔다. 울 나라 먼 조상들은 말과 나귀를 갈아타고 비 바람과 풍랑에 시달리면서 산 넘고 물 건너 수천 리 머나먼 중국 왕조에 조공 사절을 파견했었다. 조공품들 중에는 금.은.인삼 등의 특산품도 있었지만 원이 중국 대륙을 지배한 고려 왕조 중에는 "처녀 공출" (출가하지 않은 처녀를 조공으로 바침)을 하기도 했고, 일본제국주의의 침탈 기간에는 식민지 본국에 역시 쌀 등의 곡물, 금.은.철. 텅스텐 등의 금속이 바쳐지기도 했었다. 강제징집을 당하기도 했고, 만만한 여자들 쥐도새도 모르게 끌고 가 "황군의 성욕을 충족시켜주는" 이른바 위안부로 일해야 했었다.
조공:신속하고 무자비하게 집행한다
그렇다. 우리에게는 이제 자연스럽게 "조공의 유전인자"가 우리 민족 누구나의 혈관 깊숙이 새겨지게 됐다. 오랜 신고의 세월을 조공으로 연명하다가 보니 그것이 자연스레 생존의 기본기로 유전되고 마침내 그것이 유전인자가 된 것이다. 우리가 그것의 존재를 의식하든지의 여부에 관계없이 유전인자화된 조공의 심리 기제가 존재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 조공은 아주 효율적으로 집행된다. 내가 "효율적으로"라고 말하는 것은 그 조공의 집행이 아주 신속하고 정확하게 집행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신속하고 정확하게 집행된다는 것은 또 다른 말로 하면 아주 "무자비하게" 집행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섀튼 한 미디에 황우석박사의 목을 치다
그 참혹한 사건이 이제 달이 가고 해가 지났으니 이제 멀찌감치서 한번 바라보자. 이 지구상에서 어깨 위에 그 원만한 물건이 생각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면 느끼기라도 할 것이다. "거짓말쟁이"라면 다 똑같은 거짓말쟁이였는데, "사기꾼"이라면 똑같은 사기꾼인데 어찌하여 피츠버그대학교의 그 털보 유태인 학자 섀튼의 한 마디에 서울대학교는 평생을 후진 양성과 학문 연찬에 진력해온 학자 황우석의 목을 불과 몇 달 사이에 허겁지겁 날려버리느냐 말이다. 반면에 미국의 그 대학, 그 학자는 "손가락 한 마디도 부러뜨리지 않았었다." 참으로 "한국인들 기이하다"라고 지구촌 사람들은 느끼지 않겠는가. 비록 큰 소리로 떠들지는 않는다고 하드래도 속으로는 비웃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들 조차도 이 신속성과 무자비성이 바로 "조공의 심리"라는 것, 이 땅에 남아있는 자들이 저들이 살기 위하여 강대국과 그 지배층에 희생양을 만들어 바치면서 허리를 굽히고 얼굴을 살짝들어 비굴한 웃음을 흘리면서 두 손을 맞잡고 내시같은 음성으로 속삭이듯 말하는 것이다. "우리 제대로 잘했습죠?"
순자 (佐川純子) 한 마디에 젊은 학자의 목을 치다
참 놀랍다. 며칠이 지난 지금 생각해도 너무 충격적이다. 어떻게 이처럼 신속하고 과감할 수가 있는가 말이다. 우리를 40년 가까이 다스려온 이웃나라에서 "유학"왔다는 그 순자라는 젊은 여인네가 "나 한국인 강사님 한테서 성희롱 당했스므니다," 단 한 마디에 한국의 모 대학의 강사 아무개의 목이 댕그렁 소리도 요란하게 떨어지고 만 것이다.
그 순자라는 일본녀가 멍청한 방송국의 [미녀들의 수다]라는 프로에 나와서 떠들어댄 성희롱이라는 그 범죄의 내용인 즉, 그 강사가 "나하고 자주라"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주기만 하면 강의를 결석해도 출석한 걸로 쳐준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 준업한 꾸지람에 접한 그 학교당국자는 그 강사를 불러 "당신 정말 그런 말 했소?"라고 묻고, 그 강사가 엉겁결에 "네"라고 대답하자마자 전후 사정, 그 말의 의미론적 함의 따위는 따져볼 겨를도 없이 허겁지겁 "우리는 그 강사에게 성희롱의 내용을 확인했으며 교칙에 따라 해고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한 것이다.
여자의 성이 최고의 가치인가?
인간이 누리는 신체적 자유는 그 우선순위를 정확히 정할 수는 없을지 모른다. 그런데도 생명가치가 가장 소중하고 신체의 완전성이 그 다음이며 그리고 정조 가치가 그 다음을 차지할 것이다. 물론 때로는 "성의 순결성"이 그 어느 가치보다도 높을 수가 있다. 따라서 강간을 당할 위기에 놓인 여성은 그 가해자를 칼로 찔러 죽여도 처벌받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즉, 정당방위가 인정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문명국가에서 "성희롱"이라는 죄는 아주 최근에 인정된 범죄다. 범죄라기 보다는 사회적으로 비난받는 행위이다. 그 형성 기간은 10년이 채 안되고,그 행위 내용도 각국마다, 문화권마다 일정하지가 않다. 이 성희롱이라는 비행의 발생지인 미국에서는 우리가 요란하게 떠들고 있는 대부분의 내용들이 이미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의사 소통 방법" 즉 "조크로 용인되는" 그런 수준으로 몰락하고 말았다.
참으로 유별나다. 우리가 실습하고 있는 거의 모든 문화의 내용이 다 "수입되어 학습된" 문화인데 정작 발상지 본국보다도 더 극성이다. 부연하면, '하이 파이브'라는 이 이상한 동작도 수입품이다. 수입된자 불과 10 년 남짓환데 우리네는 아무 경우나 그저 허공에서 손바닥을 펼쳐서 부닥친다. 그리고 우리는 그 하이 파이브 이전에 "덩더쿵 춤이 있었다"는 사실 조차도 까마득히 잊고 살아가고 있다. 정말 얼마나 웃기는 기이.해괴.엽기의 국민인가.
성희롱이라는 것, 한국의 여성부와 시민단체와 대학의 여학생회가 두 눈에 핏발을 세우고 걸핏하면 거리고 나와 시위하고 대자보를 붙이며 나리법석을 떠는 것, 도대체 뭔가. 그저 약간의 귀에 거슬리는 자음과 모음이 발음되었다는 것 아닌가. 이 음성들은 그저 귓전을 약간 스쳤을 뿐 아무 것도 해치지 않았다. 유별나게 유난을 떨어서 그렇지 "그저 '흥'하고 웃음으로 넘길 수 있는" 것 아닌가. 그 한 마디로 하늘이 무너지나 땅이 꺼지나.
지금 세상 이 땅의 여자들은 매일 매 시각 우리들 남성들을 "성희롱하고" 있지 않나. 나는 정말이지 그렇게 느끼고 살아간다. 그런데 나는 이 나라 여성들이나, 시민단체나, 아니면 가까운 파출소라도 찾아가서 "나 성희롱당했소!"라고 호소할 때가 없다.
요새 드라마에서는 흔히 여자 주인공들이 동년배의 남자 주인공이나 그 아랴 연배의 남성 주인공들의 엉덩이짝을 "톡"하고 치기도 하고 어루반지기도 한다. 나는 그때마다 "저것들이"하고 흥분하지만 남자 주인공은 그저 웃어넘기고 있다. 때로는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더러 "너 나한테 맘 있어?"라고 묻기도 한다. 이거 남자 주인공이 또는 이 시대의 어느 직장의 남성이 여성에게 했다면 "성희롱 당했다"고 고함을 치를 행동이다. 그런데도 사내는 그저 가만히 "당하고만 있다."
나는 서양 풍속을 따라 특별히 야회복 (night gown)을 입어야 할 계제도 아닌데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여자 진행자들이 그 엉크런 어깨를 다 드러내거나 가슴이 드러바 보이는 옷을 입고 있을 때 나는 "성희롱을 당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느낀다.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하면서 핫팬츠를 걸치고 허연 다리를 다 드러낸 여성들에게 나는 "성희롱을 당한다."
순자, 일본에서도 난리를 쳤을까?
순자 (佐川純子)가 이 여자의 조국 일본에서도 그렇게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난리 요란을 떨었을까? 사무라이들이 일본의 거리를 휩쓸고 다녔던 나라, 이 나라 여성들처럼 "드세게 살지도 못했고" 남자들 앞에 공손히 무릎꿇고 앉아야 했고 외출하는 남편의 뒤꼭지를 향해 허리굽혀 "안녕히 다녀오세요!"라고 인사를 올렸던 나라, 기모노를 입고 다니다가 미묘한 시각 미묘한 장소에서 사무라이의 요구가 있으면 응해야 했던 그런 전통을 가졌던 나라에서 온 순자가 왜 대한민국에 와서 저리도 요란스레 핏발선 눈동자를 굴리나,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참으로 해괴망측한 일이다.
그 심리 동기를 하나 따져보면 우선은 KBS라는 멍청한 미디어가 "멍석을 깔았기 때문"이고 남희석이라는 이름의 진행자가 "한국 남성들에게 성희롱당한 경험이 있으면 이야기해 주세요,"라고 공손한 어조로 허리를 굽혀 청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이 해괴한 에피소드는 "멍석을 깐 KBS와 멍청한 진행자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자존하지 않으면 멸시를 당한다
개인으로서나 조직으로서나 그리고 하나의 주권적 독립을 가진 자주 국가로서 그리고 그 국민으로서 우리는 최소한의 자존을 지켜야 한다. 우리는 말하자면 주인이다. 주인은 주인으로서의 자긍심이 있어야지 손님한테 한없이 머리를 조아린다고 좋은 주인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비유하자면, 최근 년 최근 월 또는 최근 일의 이 나라 구성원들의 행태를 보면 예컨대 누가 내 또는 당신 부모나 처 자식이나 형제 자매를 끌고 와서 "이놈 나쁜놈~!"이라고 비난하기만 하면 바로 그 순간 "너는 내 가족이 아니다"라거나 또는 "당신은 내 부모가 아니오"라고 내치고 문을 쾅하고 닫을 태세다. 아니, 지금 우리는 그런 짓을 하면서 살고 있다.
그런 외부의 비난이 있다고 해도 전후 사정도 들어보고 처벌을 하는 경우에도 단계적으로 가벼운 처벌로부터 차츰 무거운 처벌로 옮겨가지는 않고 말하자면 그 자리서 "즉결처분"을 하고 마는 격이다. 이번 순자 (佐川純子) 사건의 경우 그 대학교는 그 당사자 강사를 불러 일차로 경고를 발하면서 정직 몇 개월을 명해도 됐고 감봉 몇 개월 처분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순자 한 마디로 즉결처형을 한" 것이다.
프로그램 초기의 신선한 시도를 변질시켜, 단순 신변잡기의 말장난/폭로 쇼프로가 되버린 미녀들의 수다... 바로 그 쇼프로에서 한 일본인의 성희롱 경험 폭로... 그로 인한 한 사람의 매장... 민주주의 사회에서 있어서는 안될 말도 안되는 이런 황당한 일련의 프로세스에, 아무런 비판의식도 갖지 않는, 일부 무분별한 시민들과, 몰지각한 여성단체... 그리고 서둘러 한사람을 잘라버린, 유치한 외국어대학... 이 사건의 결말에 꽤나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내 생각을 정말로 가감없이, 중립적인 입장에서 냉정하게 표현해준 글이다. 내 이런 생각들에 대해서, 일부 개념없는 사람들은 그 강사를 두둔한다고 한다. 머리속에 뇌는 안드로메다로 파견보낸 것일까?... 난 그 강사를 두둔하는게 아니라, 그 강사가 이 사회에서 매장되기까지의 그 일련의 과정들을 비판하는 거다. 우리나라는 여론재판이 발생해서는 안될, 법치국가이니까 말이다.
아고라 사회방은 대부분 쓰잘데기 없는, 비난과 욕설/선동이 태반이지만, 가끔씩 이렇게 멋진 글이 올라오기도 한다. 내가 아고라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
승자가 모든 과실을 독식하고 패자는 고사해가는 나라. 지배와 멸시, 군림과 굴종의 사회. 하지만 승자독식은 독약이다. 99%의 패자뿐 아니라 1%의 승자에게도 그렇다. 전부가 아니면 전무인 사회는 양극화가 심해진다. 패자는 지배층과 부자를 증오한다. 저마다의 이기적인 무한투쟁. 우리 공동체의 자해행위. 우린 지금 승자독식의 부조리를 그냥 두고 봐야만 할 것인가?
승자독식사회(winner takes all socierty) 구성원의 삶은 고단하고 황폐하다.
승자독식의 사회·경제적 시스템은 이 시대 젊은이들의 삶에 깊은 음영을 드리우고 있다. ‘개성과 잠재력을 마음껏 발휘하라’ 는 어른들의 주문은 실상 기만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김문석 기자) 2007년 대한민국의 초상이 참담한 이유는 그 그림이 ‘승자독식’이란 밑그림 위에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시장경제, 자유경쟁, 발전과 진보라는 구호는 일견 화려하나 그 구호 밑에 존재하는 나락의 깊이는 공포감을 불러 일으킨다.
승자독식의 사회·경제적 시스템은 이 시대 젊은이들의 삶에 깊은 음영을 드리우고 있다. ‘개성과 잠재력을 마음껏 발휘하라’는 어른들의 주문은 실상 기만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대학 또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안정적인 일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청년들의 비율은 고작 10% 내외를 벗어나지 못한다. 나머지 90%는 비정규직, 아르바이트, 원치 않는 학업 연장, 또는 백수의 삶을 살아야 하는 현실이다.
한국사회의 20대 청년의 월 평균 소득은 88만 원에 불과하다. 20대 청년 상당수가 학생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처럼 빈약한 기대 소득으로는 인간다운 생활의 틀을 구축하기가 난망하다. 승자독식 사회의 20대는 경제적으로 ‘의미 있는 집단’으로 대우받기도 힘들다. ‘귀족 마케팅’ ‘10대 마케팅’ ‘실버 마케팅’은 있어도 ‘20대 마케팅’이란 개념은 사라진 지 오래다. 한국사회의 20대는 부모에게 용돈을 받는 10대보다 구매력이 열악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청년들의 미래에 희망을 주지 못하는 사회는 경제력의 총량이 아무리 커도 지속적인 발전의 동력을 구하기 어렵다. 금융경제연구소 우석훈 연구위원의 지적처럼 한국의 20대는 ‘소외된 계층’ ‘버림받은 세대’다.
승자독식 대한민국의 사회구조는 30~40대 장년의 삶, 노년의 삶에도 깊은 상흔을 남기고 있다. 학령층의 자식을 둔 부모들은 천정부지의 사교육비로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다. ‘승자독식의 사회구조’를 익히 알고 있는 이들은 자식들을 ‘승자의 반열’ 위에 올리기 위해 엄청난 희생과 출혈을 감수한다.
지속발전 가능한 사회시스템 필요
경쟁적인 사교육비 지출이 OECD 국가 중 선두를 달리고 있지만 그렇게 교육받은 아이들의 극소수만 승자를 키운다는 소위 명문대의 문을 두드릴 수 있다. 40대의 대기업 중간 간부 박형진씨(가명)는 날로 척박해지는 자신의 삶을 이렇게 묘사했다. “적지 않은 연봉(8000만 원)에도 불구, 삶의 질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다. 600만 원짜리 월급쟁이지만 아이들 교육비 월 300만 원을 지출하고 나면 생활은 빠듯하다. 7년째 32평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좀더 큰 집을 마련할 수 있다는 소박한 꿈도 꿀 수 없다. 회사 내의 경쟁은 날로 치열해져 50대 이후에도 직장을 유지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
승자독식의 기업문화는 ‘선택받은 정규직’의 삶에도 치유하기 힘든 상처를 남기고 있다. 엄정하고 잔인한 ‘인사고과’는 기업 안에서도 승자와 패자를 확연하게 가르고 있다. 승자에게 주는 혜택은 풍족하고 윤택하나, 패자에게는 가혹한 대가를 강요한다. 사람들은 이같은 기업문화를 ‘효율과 생산성을 강화하는’ 최선의 시스템으로 인식하고 있다.
승자독식의 사회시스템이 지속적으로 재생산되고 있다는 점도 문제다. 1980년대 운동권 문화의 전통은 소위 ‘노-학 연대’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엘리트로서의 삶과 기층 노동자의 삶이 결합할 수 있다는 ‘공동체적 비전’에 근거했다. 그것이 비록 ‘이상적인 공상’이었다 해도 사회 전체를 바라보는 원숙한 시각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2000년대 대한민국 청년세대의 문화는 본질적으로 ‘개인적’인 것이다. 협력을 통해 문제를 풀어본 경험이 없다. 그래서 ‘협력게임’을 통한 집단적 해법보다는 개별적인 해법을 찾는다. 이들 스스로 승자독식 사회의 피해자면서도 ‘승자독식’의 사회원리를 저항감 없이 받아들인다. 그래서 살벌한 ‘승자 위주의 사회 작동 메커니즘’은 재생산, 확산, 지속될 수밖에 없다. 경쟁에서 좀더 유리한 입지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일에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보니 “대학 학점 4.5로도 부족하다”면서 영어공부에 목을 매고, 기업의 인턴 프로그램 등 간접 사회경험에 매달린다. 그같은 노력은 그러나 ‘주체적인 결단’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다. 자유로운 상상력이 부족하고 인생에 대한 다양한 가치가 발붙이지 못한다. 오직 물질적 성취로 상징되는 성공에만 매달리는 청년들을 양산하고 있다.
젊은 세대가 승자독식의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가 확장하면서 미국과는 다른 사회 모델을 지향했던 유럽 국가들도 보수화하고 있다. 부유세를 폐지하고 복지 비용을 줄이는 유럽 국가들이 속출하고 있다. 최근의 잇단 선거에서도 사실상 승자의 가치를 찬양하는 우파 정치세력과 그 지도자들이 각종 선거를 휩쓸고 있다.
그러나 한국형 승자독식 문화가 가혹한 이유는 패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안전망이 여전히 부족하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 기업이 26세 미만의 청년을 채용하면 2년 동안에는 자유롭게 해고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최초고용법’(CPE)이 지난 4월 좌초됐다. 스위스의 지방정부는 공공일자리를 만들어서 20대를 우선적으로 고용하고 있다.
홍성태 상지대 교수는 “이런 추세로 양극화가 계속될 경우 사회 갈등과 대립이 전면화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더 심각할 경우 사회해체로까지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지금처럼 ‘약육강식’과 ‘승자독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사회는 결코 지속가능하지 않으며, 그래서 낡은 개념으로 치부되는 복지국가의 발전모델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다.
패자를 위한 최소한의 안전망 없어
좌파정부로 낙인찍힌 참여정부 역시 ‘승자독식’의 사회구조에 메스를 대기에는 역부족이다. 최근 권오규 경제부총리는 “세계화와 지식정보화의 빠른 진행으로 승자독식과 양극화라는 또 다른 문제가 야기되고 있지만 세계화와 지식정보화를 늦추거나 경쟁을 줄이고 보호를 강화하는 것은 결코 답이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한국사회의 발전은 ‘경쟁을 통과한 우수한 승자’들이 주도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승자독식의 사회문화는 경제적인 부분에만 적용되는 원리가 아니다. 상부구조를 이루고 있는 정계와 문화예술계, 교육계, 대중문화와 체육계 등 거의 모든 부문에 걸쳐 승자에 대한 찬양이 이뤄지고 있다. 오직 톱스타만 주목받는 사회는 지속적인 발전이 불가능하다. 독립영화, 인디밴드, 언더그라운드들이 공존할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이 좀처럼 형성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심상정 민주노동당 의원은 승자독식 사회의 개혁 전략을 이렇게 제시하고 있다.
“분배를 통한 성장,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이 필요하다. 이를 지속가능한 발전의 전망으로 업그레이드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지금까지 한국 정치가 설정한 경제 주체는 오직 재벌과 대기업뿐이었다. 그러나 중소기업, 노동자, 농민, 영세 자영업자, 실업자도 경제 주체다. 이들이 함께 발전할 수 있는 발전 전략, 서민경제의 틀을 만들어내야 한다. ”
통계청에 의하면 올 1분기 상위 20%의 국민이 소득이 하위 20% 소득의 8배에 달했다. 그 격차는 날로 커지는 추세다. 승자에 대한 찬양은 지금까지만으로도 충분하다. 대다수 약자와 패자에 대한 무관심과 경멸은 경제 규모 세계 12위의 대한민국의 지속 발전을 위협하고 있다. 승자독식은 승자에게도 독약이다.
한기홍<편집위원> glutton4@naver.com - 대한민국 희망언론! 경향신문, 구독신청(http://smile.khan.co.kr) - ⓒ 경향신문 & 미디어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우리나라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주는 글이 아닌가 싶다. 이런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이들은, 이 땅을 떠나고 있다. 떠날 수 있는 여건을 가진자들은 역시, 승자다.. 승자는 떠나고, 패자는 남는다. 패자들끼리, 또다시 승자를 가리고.. 패자는 남는다... 대한민국의 미래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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