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와 법치주의 - 시위냐 진압이냐, 닭이냐 달걀이냐...

[Luciah Actually.../Luciah's Voice]

 사느라 바쁘다는 핑계로, 아고라를 떠나있던 몇 개월 동안.. 아고라는 참 많이도 더럽혀졌다.. 최근들어, 여기 올라오는 글들을 읽어보면, 아고라에는 수구꼴통 알바와 좌파 선동세력 밖에 없다. '아고라유저 = 수구꼴통 알바 or 좌파선동세력' 인셈인데, 이 등식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은, 대부분의 아고라 유저들은 알 것이라고 본다.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고, 치열하게 토론했던, 예전의 아고라가 그리워지는 시점이다.

 요즘은 용산 철거민 관련해서, 시위와 진압의 폭력성에 대해 말들이 많은 것 같다. 수구꼴통알바들의 논리는, 닥치고 법을 존중하라이고... 좌파선동세력의 논리는, 법이 폭력적이니, 저항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이 시점에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요즘들어, 민주주의가 법치주의와 등가인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부쩍 많은데, 한마디로 개념탈출이다. 오히려 민주주의는 법치주의의 모순들을 혁파하면서 발전해왔다. 민주주의는 법치주의와 등가가 아니며, 보다 상위의 개념이다. 따라서, 법이 문제가 있다면, 민주주의에 근거하여, 법을 수정하는 것이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등가로 두면, 우리는 엄청난 자가당착에 빠지게 된다. 프랑스에 민주주의를 가져다 준, 프랑스 대혁명이 한순간에 단순민중봉기로 전락하게 되며, 우리 역사에 존재하는 4.19 역시, 민중폭동에 지나지 않게 된다. 또, 대만은 나라로서의 정체성을 잃고, 단순히 중국공산정권에 대한 불만세력이 모여사는 곳에 지나지 않게 된다. 또, 3.1운동 이나, 독립군의 활동 또한, 단순한 민중 봉기 혹은 반란군 폭동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러한 예는 수도 없이 많다. 

 민주주의에 의거하여, 법이 잘못되어 있거나, 혹은 폭력적이라면, 그것은 법이기 때문에 정당한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에 의거하여 잘못된 법이라 보게 되는 것이다. 또한, 대부분의 민주주의는 대의정치에 기초하는데, 국민의 대표자들이, 대의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고, 특정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는 법을 만들 경우, 이 역시 개정의 대상이 되는 것이며, 우리는 우리의 대표자를 전부 감시할 수 없다는 데서, 대의정치의 맹점이 발생한다. 그리고, 이 땅의 썩은 정치인들은 이 맹점을 지독하게도 우려먹고 있다.  

 민주주의건, 법치주의건 그 근간에는 인간존중 및 생명존중이 기저에 있다. 법이 인간 혹은 생명보다 우선할 경우, 우리는 그 법을 폭력적이라고 하며, 그 법을 집행하는 공권력도 폭력적인 공권력이라고 한다. 법과, 공권력이 폭력적일 때는 제어할 수 있는 장치가 없다. 이것이 바로 법치주의의 맹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우리의 법이 폭력적이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벼랑끝에 모여있는 사람들이 있다. 더 밀려나면 갈곳은 벼랑밑으로 떨어지는 것 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 벼랑은 최근에 주인이 바꼈다. 그런데, 그 벼랑의 주인은 사람들을 밀어내고 싶다. 이런 경우, 단순히 법과 공권력을 내세워 사람들을 밀어낸다면, 법은 지켜질 것 이나, 그 법은 인간/생명보다 우선하게 되며, 폭력적이다. 이 경우, 그 벼랑의 사람들은 그냥 밀려나 벼랑밑으로 떨어져야 하는가? 아니면, 저항해야 하는가? 이런 경우, 그냥 죽던지 저항하더지 둘 중 하나이다. 이런 상황을 알면서도, 밀어붙이는 법과 공권력은 과연 정당한가? 

ps. 우리 헌법은 집회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그러나, 집회 결사는 경찰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하위법이 있다. 하위법이 우리 법치의 근간인 헌법을 제한하는 것은 과연 정당한가? 도데체 어떤 법을 따라야 하는 것인가? 우리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집회결사의 자유를 평화적으로 누릴 수 있도록, 보호해주는 것이 더 정당하지 않을까? 


 2009년, 우리는 너무도 폭력적인 법을 치열하게 경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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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서노는 프라다를 벗었다.

[Luciah Actually.../Luciah's Voice]
매주 월요일과 화요일 국민 절반의 눈과 귀를 붙잡아 두었던 드라마 '주몽'이 스페셜 방송을 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역사 자료의 박족(薄足)함과 고증의 어려움으로 인해 드라마는 많은 극적 허구와 환타지에 의지해야 했지만,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을 재조명하고, 또 고구려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고취시킨 면에서 드라마 '주몽'은 소기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한 것 같다. 특히 고구려 시조 '추모(계루부 고氏)'의 아내이자 백제 시조 '온조(부여氏)'의 어머니인 여장부 '소서노'를 역사의 한 인물로 끄집어 낸 점은 드마라 '주몽'의 가장 큰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드라마가 보여준 소서노의 행적은 물론 대부분 역사적 추측, 가설, 허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고구려와 백제라는 우리 역사상 가장 강대했던 두 나라의 건국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부정할 수 없는 역사'만으로도 소서노라는 실제 인물의 위대함은 충분히 입증될 수 있을 것이다.

드라마 '주몽'을 제작한 MBC는 사극 속 '여성'이라는 이름을 통해 여성성을 '사회적 담론' 안으로 이끌어 내는데 꾸준한 역할을 해왔다. 멀리는 드라마 '장희빈' 속의 희빈 장氏가 그러하고, 가까이는 드라마 '허준' 속의 예진아씨, '다모'' 속의 채옥, '대장금' 속의 대장금 등이 그러하다. 장희빈에서 시작하여 소서노로 마무리 되는 MBC 사극 속의 여성상은 20여년 간 변화한 우리 사회의 여성에 대한 '인식'을 고스란히 반영해왔다. 그리고 이러한 MBC 드라마 속의 '여성'의 진화는 다른 방송국의 드라마들이 보여준 '소극적 여성상'과는 큰 차이를 드러냈다는 점에서 큰 점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소서노는 이전 사극 속의 여인들과는 달리 여성으로서의 독립적이고 비중있는 지위를 차지하였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장희빈은 남성 중심의 권력 사회에서 영악함을 무기로 살아남으려는 여성을 그리고 있는데, 결국 남성 중심 사회의 공적이 된 장희빈의 죽음은 정숙한 여성을 바라는 당시의 시대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후에 등장하는 예진아씨는 섬세함과 헌신이라는 여성의 장점을 통해 허준이라는 남성의 인생 행보를 곁드는 역할을 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여성상으로서의 독보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데는 실패한다. 채옥은 '물리력'이라는 남성의 독점적인 영역에 도전하여 그 능력을 발휘하지만 결국 '사랑'과 '신분'이라는 올가미에 갖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는 모습을 보인다. 대장금에 이르러 여성은 드디어 드라마 속 주인공을 차지하는데, 시련을 극복하고 '남성'의 외조를 받으며 성취를 이루는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는 수준까지 다다른다. 그러나 대장금도 결국 남성 중심 사회의 장애를 뛰어넘지 못하고 성취의 중단을 맛보아야 하는 모습으로 마무리 되었다는 점이 한계였다.

그런데 이제 소서노는 '남성 중심 사회의 한계'가 아니라 스스로의 선택으로 권력을 양보하는 여성상을 보여주고 있다. 강요가 아니라 스스로의 판단으로 권력이라는 '비단옷'을 벗어버린 것이다. 드라마 속 그 누구도 '소서노'가 여자이기 때문에 왕이 될 수 없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건국에 필요한 재정적, 지리적, 인적 자원을 제공한 소서노의 역할은 물리적, 리더적 자원을 제공한 주몽의 역할적 비중에 전혀 뒤쳐짐이 없다고 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주몽에게 왕위를 양보한 소서노의 선택에 주변인들은 불만을 품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드라마 '주몽'을 잇는 사극으로 '온조'가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 '선덕여왕'을 선택한 MBC의 결정은 그런 면에서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더 이상 양보를 강요받거나 선택받는 것이 아니라 최고의 '자리'까지 스스로 당당하게 올라서는 여성상은 이제 우리 사회가 수긍해야 할 마지막 결론이기 때문이다.

유신 헌법과 독재의 탄압이 계속되던 1977년 무렵 이제 막 대학으로의 일반적인 진입을 성취한 여성들은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남성들의 투쟁에 합류하며 여성운동의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1987학번 임수경은 1989년 문익환 목사와 함께 방북함으로서 여성이 남성 못지 않은 사회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 1997년 출간되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려는 여성'을 비판한 이문열의 소설 '선택'은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과 당당한 목소리에 두려움을 품은 남성들의 불편함을 등에 업고 인기를 얻었다. 그리고 이제 2007년, 우리는 어쩌면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을 마주해야 할지도 모르는 현실을 목도하고 있다. 산업화의 진전과 완성을 통해 지난 30여년 간 여성들의 지위는 눈에 띄게 고취되었고, 소위 잘나가는 여성들에게 남자들은 자신들의 자리를 내어주어야 하는 상황까지 다다랐다. 남성 중심의 호주제도 폐지법안이 국회 통과를 눈 앞에 두고 있고 이제 아버지의 성(姓)이 자녀에게 강요되는 일도 먼 옛날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하지만 드라마가, 또 제도가 이러한 변화상을 보여주고 반영하는 것만으로 진정한 변화가 완성되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착각이다. 남성 중심의 서열 구조(하이에라키, Hierachy)와 근본 구조(Foundation Basis)가 바뀌기 위해 가장 중요한 열쇠가 '남성들의 마음' 속에서 아직도 꺼내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열쇠가 밖으로 나오지 않는 한 남녀평등은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숙제가 될 것이다.

누나들이 많은 개인적인 환경과 세대, 또 내가 다닌 대학의 환경 탓인지 몰라도 나는 남녀평등의 문제에 있어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견해를 품고 살아왔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진입하면서, 나의 이러한 낙관적인 시각은 많은 도전을 받게 되었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에도 우리가 소위 폄하하는 '된장녀'라든지 '골통 페미스트' 유형의 여성을 보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여성들의 문제점을 '여성성'이 아니라 '인간성'으로 이해했었다. 그런데 오히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야 우리 사회가 남녀 평등의 문제에 있어 진보와 퇴보를 동시에 겪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사회에 진출한 이후, 연애에 있어서는 평등한 모습을 보이던 많은 여성들이 결국 기존의 사회적 조건을 찾아 결혼을 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진보를 자처하던 많은 여성들이 기존의 남성 구조에 편입되어 남성 기득 구조의 낡은 악습과 처세술을 배워가는 모습에서 실망을 느끼기도 한다. 새롭게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을 개척하지 못하고 여전히 남성에게 종속된 삶에 만족하려는 여성들에게서도 실망을 느낀다. 남녀 동등한 여성(如性)이 아니라 우월한 여성(女性)을 설파하고 남성을 적으로 간주하며 화합을 거부하는 일부 여성들에게서도 나는 많은 한계를 목격한다. 우리 나라의 사교육 열풍과 부동산 투기 광풍, 과소비 풍조, 성(性)의 상품화, 종교기관의 기업화 등의 사회적 문제에 있어서는 여성들이 남성보다도 더 많은 책임이 있다는 점에 나는 동의한다.

나는 남자들이 잘 했다는 것이 아니다. 남성 중심의 사회를 옹호하고 싶지도 않다. 남성들은 지난 수 천 년간 여성보다 몇 배는 더 많은 잘못을 하였으며, 불합리한 특권을 누렸으며, 여성을 지배하고 통제하려고 하였다. 여성의 부조리는 남성들의 잘못으로 이루어진 사회 부조리와 부패상에 비하면 새발의 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성들의 자각과 변화를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제 많은 남자들이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기 위해 애쓰듯, 여성들도 변화를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곳간 속에 썪고 있는 '평등함과 조화'라는 곡식을 꺼내려면 남성들이 마음 속에 감춰둔 그 곳간의 열쇠를 끄집어 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지혜를 여성들이 인물 '소서노'에게서 끄집어 낼 수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우리 옆 대학의 여성들이 우리 대학의 '여성상'과의 대조로 인해 인기가 없었던 것처럼, '소서노'라는 인물을 통해 그릇된 여성상에 대한 새로운 평가와 반성이 이루어 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정치권에 진입해 있는 상당수의 저급한 여성 정치인의 모습은 남성과 똑같이 '나쁜 물이 들어가는' 행태로 인해 여성의 사회 진출에 많은 우려를 던져준다. 남녀평등을 외치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이 되면 여성이라는 이유로 의무와 책임을 회피하는 여성들의 모습에서 남자들은 '남녀평등'이라는 구호에 대해 배신감과 모멸감을 느낀다. 실상이 정확히 파헤쳐지지 않은 사건에서 단순히 남성이 성범죄의 가해자일 가능성 만으로 성급히 판단하고 행동한 모 대학 여총 간부의 모습은 엇나가도 너무 엇나간 우리나라 '여성주의(페미니즘)'의 단면을 잘 보여준다. 그러다 보니 '수영장 생리 기간 할인' 같은 아주 기초적이고 합리적인 이의제기마저도 남성들의 비아냥과 비난을 받게 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마저 벌어지고 있다. 발렌타인 데이가 '여자가 남자에게 무엇을 주는 날'이 아니라 '남자가 여자에게 무엇을 주는 날'이었다면 화이트 데이 같은 것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친구의 말에서 나는 남자 집단의 거대한 절망과 냉소를 읽었다. 사실 겉으로는 아무도 이야기를 하지 않지만, 막상 결정적인 순간이 되면 '여성 대통령'을 받아들일 수 없어 다른 란에 도장을 찍어버리는 남성들도 상당수일 것이라고 나는 감히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문제와 현상들이 제도나 서류상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남성들 마음 속의 문제'임을 우리는 직시하게 된다. 우리의 민주주의가 법과 시스템 상으로는 별 문제가 없지만 우리의 정신과 생활 속에서는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렇다면, 이제 드라마 속 소서노의 어떤 모습이 나로 하여큼 이처럼 그녀에게 열광케 하는지 들여다보자.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따라 상단을 이끌고 대륙을 누비는 소서노는 남성들도 당해낼 수 없는 배짱과 모험심을 보여준다. 유약하고 색을 밝히는 어린 주몽을 비웃어 주고 꾸짖는다. 그러다가 주몽이 차츰 지혜와 기상을 키워가자 자신의 편견이 잘못이었음을 솔직히 인정하고 주몽을 사모하게 된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연정을 배신하지 않았고 권력을 지키기 위한 정략적이고 강요된 혼인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자신의 사랑이 죽어버린 현실에도 절망하거나 주저앉지 않고 자신의 상단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어린 두 아들의 편모 역할을 위해 골방으로 은둔하는 퇴행을 선택하지도 않는다. 자신에게 왕위를 획책하는 주변 사람들의 부추김에 대해서도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판단한다. 덧없는 권력을 위한 피바람보다는 미래를 위한 화해와 결별을 모색한다. 자신의 잘못된 생각과 어리석음을 솔직히 인정하고 배우려는 자세를 보인다. 자신의 개인적 이익보다는 백성과 나라를 위할 줄 알며, 타협할 줄 알고 양보할 줄 안다. 자신의 아이들이 주어진 권력의 단맛에 빠지기 보다는 새롭게 개척될 미래를 통해 성장하고 완성되길 바라는 훌륭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인다. 한 사람과의 사랑과 황후자리가 결코 작은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대(大)를 위해 그 소중한 것을 포기하는 진정 영웅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소서노가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라고 해도 영웅이 되기에는 결코 부족함이 없다는 말이다.

바로 이 점에서 '여성' 영웅 소서노의 모습이 드러난다. 남성들의 단점이나 추악함과 타협하지 않는 모습이 그렇다. 그렇지만 여성으로서의 장점을 포기하지 않고 발전시킨 모습이 그렇다. 남성의 장점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시키고 배우려는 모습이 또 그러하다. 남자나 여자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기백과 사랑, 배려를 잃지 않는 모습 역시 그렇다. 고구려 건국 무렵 '비단'은 너무나 귀한 물품이었다. 왕족이나 높은 귀족이 아니면 꿈도 꿀 수 없는 '명품'이었다. 하지만 소서노는 기꺼이 그 비단옷을 벗어 버렸다. 그것은 자존심을 버린 것이 아니라 집착을 버린 것이다. 작가 지망생의 명품 잡지사 비서 생활을 그린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가 많은 여성들의 관심을 얻었었다. 우리나라 여성들은 그 영화를 통해 어떤 생각을 했을까? 왜 작가는 하필 '악마'가 프라다를 입는다고 했을까? 아마도 잡지사 편집장의 모습에서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남성들과 똑같이 권모술수에 능하고 차갑게 배신할 수 있어야 여성이 성공할 수 있는 현대 사회의 단면을 '악마'로 풍자하고 싶었을 것이다.

많은 여성들이 '명품'을 통하여 사회적 성취와 부의 축적을 과시하려고 한다는 점은 만국공통인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꼭 나쁜 것이라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여성들에게 주어진 생물학적 특성과도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명품(권력, 부, 지위)을 얻기 위해서 남자도 여자도 악마가 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소서노까지는 아니어도 좀 더 따뜻하고 인간적이며 정직한 여성들이 우리 사회에 좀 더 많아지길 바란다. 잔인하게 죽어가는 동물을 생각한다면, 또 노예로 팔려가는 아이들을 생각한다면 적어도 모피나 다이아몬드는 걸치지 않는 양식 정도는 갖춘 여성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남성들도 이젠 변화를 대세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여성들 스스로도 이러한 변화를 악용하고 부당한 이득을 보려고 해서는 안 된다. '선택' 속의 사대부 며느리처럼 일생을 희생하는 여성도, 남자는 필요없다며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겠다는 여성도 진정 이 사회가 필요로 하는 여성상은 아니다. 프라다를 입기 위해 악마가 되는 것이 아니라, 대의와 진보를 위해 비단옷을 벗어 버릴 수 있는 소서노가 우리 사회에 많아질 수록 우리 '남자'들 마음 속에 숨겨진 열쇠도 조금씩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진정으로 남녀가 평등하게 화합하는 세상이 올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blog.daum.net/lavie75

출처: 아고라 사회방
저자: 누구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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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세호님의 글은 언제나 가치 중립적인 입장에서, 담담한 어조로 쓰여진다.
어떤 사람처럼, 날카로운 이성의 논리를 펴지 않으며, 선동적인 단어들로, 부르짖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누구세호님의 글은 오히려, 더욱 공감대를 형성하며, 읽는 이로 하여금, 동의하지 않을 수 없게하는 힘이 있다.
아고라엔 가끔이지만 이렇게 좋은 글들이 올라온다...
역시, 난 아고라를 떠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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佐川純子 한 마디에 즉결처분:조공의 심리학

[Luciah Actually.../Luciah's Voice]
인간 행동을 지배하는 무의식의 세계를 탐구하여 우리들에게 보여준 분은 바로 프로이트(Freud)였다. 나는 최근 년 최근 월 (가장 가까운 해 또는 가장 가까운 달)에 우리 사회에서 발생했던 사건들을 지배하고 있는 "심리적 기제가 무엇인가"하고 생각해 보게 됐다. 그 결과 나는 우리 사회에는 "조공의 심리가 작용하고 있다" (The psychology of tribute is at work)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아주 멀리는 1천 여 년, 아주 가까이는 100년 이 나라는 때로 왕조가 때로는 민족이 살기 위하여 인근 강대국들에 조공을 바쳐왔다. 울 나라 먼 조상들은 말과 나귀를 갈아타고 비 바람과 풍랑에 시달리면서 산 넘고 물 건너 수천 리 머나먼 중국 왕조에 조공 사절을 파견했었다. 조공품들 중에는 금.은.인삼 등의 특산품도 있었지만 원이 중국 대륙을 지배한 고려 왕조 중에는 "처녀 공출" (출가하지 않은 처녀를 조공으로 바침)을 하기도 했고, 일본제국주의의 침탈 기간에는 식민지 본국에 역시 쌀 등의 곡물, 금.은.철. 텅스텐 등의 금속이 바쳐지기도 했었다. 강제징집을 당하기도 했고, 만만한 여자들 쥐도새도 모르게 끌고 가 "황군의 성욕을 충족시켜주는" 이른바 위안부로 일해야 했었다.


조공:신속하고 무자비하게 집행한다

그렇다. 우리에게는 이제 자연스럽게 "조공의 유전인자"가 우리 민족 누구나의 혈관 깊숙이 새겨지게 됐다. 오랜 신고의 세월을 조공으로 연명하다가 보니 그것이 자연스레 생존의 기본기로 유전되고 마침내 그것이 유전인자가 된 것이다. 우리가 그것의 존재를 의식하든지의 여부에 관계없이 유전인자화된 조공의 심리 기제가 존재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 조공은 아주 효율적으로 집행된다. 내가 "효율적으로"라고 말하는 것은 그 조공의 집행이 아주 신속하고 정확하게 집행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신속하고 정확하게 집행된다는 것은 또 다른 말로 하면 아주 "무자비하게" 집행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섀튼 한 미디에 황우석박사의 목을 치다

그 참혹한 사건이 이제 달이 가고 해가 지났으니 이제 멀찌감치서 한번 바라보자. 이 지구상에서 어깨 위에 그 원만한 물건이 생각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면 느끼기라도 할 것이다. "거짓말쟁이"라면 다 똑같은 거짓말쟁이였는데, "사기꾼"이라면 똑같은 사기꾼인데 어찌하여 피츠버그대학교의 그 털보 유태인 학자 섀튼의 한 마디에 서울대학교는 평생을 후진 양성과 학문 연찬에 진력해온 학자 황우석의 목을 불과 몇 달 사이에 허겁지겁 날려버리느냐 말이다. 반면에 미국의 그 대학, 그 학자는 "손가락 한 마디도 부러뜨리지 않았었다." 참으로 "한국인들 기이하다"라고 지구촌 사람들은 느끼지 않겠는가. 비록 큰 소리로 떠들지는 않는다고 하드래도 속으로는 비웃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들 조차도 이 신속성과 무자비성이 바로 "조공의 심리"라는 것, 이 땅에 남아있는 자들이 저들이 살기 위하여 강대국과 그 지배층에 희생양을 만들어 바치면서 허리를 굽히고 얼굴을 살짝들어 비굴한 웃음을 흘리면서 두 손을 맞잡고 내시같은 음성으로 속삭이듯 말하는 것이다. "우리 제대로 잘했습죠?"


순자 (佐川純子) 한 마디에 젊은 학자의 목을 치다

참 놀랍다. 며칠이 지난 지금 생각해도 너무 충격적이다. 어떻게 이처럼 신속하고 과감할 수가 있는가 말이다. 우리를 40년 가까이 다스려온 이웃나라에서 "유학"왔다는 그 순자라는 젊은 여인네가 "나 한국인 강사님 한테서 성희롱 당했스므니다," 단 한 마디에 한국의 모 대학의 강사 아무개의 목이 댕그렁 소리도 요란하게 떨어지고 만 것이다.

그 순자라는 일본녀가 멍청한 방송국의 [미녀들의 수다]라는 프로에 나와서 떠들어댄 성희롱이라는 그 범죄의 내용인 즉, 그 강사가 "나하고 자주라"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주기만 하면 강의를 결석해도 출석한 걸로 쳐준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 준업한 꾸지람에 접한 그 학교당국자는 그 강사를 불러 "당신 정말 그런 말 했소?"라고 묻고, 그 강사가 엉겁결에 "네"라고 대답하자마자 전후 사정, 그 말의 의미론적 함의 따위는 따져볼 겨를도 없이 허겁지겁 "우리는 그 강사에게 성희롱의 내용을 확인했으며 교칙에 따라 해고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한 것이다.


여자의 성이 최고의 가치인가?

인간이 누리는 신체적 자유는 그 우선순위를 정확히 정할 수는 없을지 모른다. 그런데도 생명가치가 가장 소중하고 신체의 완전성이 그 다음이며 그리고 정조 가치가 그 다음을 차지할 것이다. 물론 때로는 "성의 순결성"이 그 어느 가치보다도 높을 수가 있다. 따라서 강간을 당할 위기에 놓인 여성은 그 가해자를 칼로 찔러 죽여도 처벌받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즉, 정당방위가 인정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문명국가에서 "성희롱"이라는 죄는 아주 최근에 인정된 범죄다. 범죄라기 보다는 사회적으로 비난받는 행위이다. 그 형성 기간은 10년이 채 안되고,그 행위 내용도 각국마다, 문화권마다 일정하지가 않다. 이 성희롱이라는 비행의 발생지인 미국에서는 우리가 요란하게 떠들고 있는 대부분의 내용들이 이미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의사 소통 방법" 즉 "조크로 용인되는" 그런 수준으로 몰락하고 말았다.

참으로 유별나다. 우리가 실습하고 있는 거의 모든 문화의 내용이 다 "수입되어 학습된" 문화인데 정작 발상지 본국보다도 더 극성이다. 부연하면, '하이 파이브'라는 이 이상한 동작도 수입품이다. 수입된자 불과 10 년 남짓환데 우리네는 아무 경우나 그저 허공에서 손바닥을 펼쳐서 부닥친다. 그리고 우리는 그 하이 파이브 이전에 "덩더쿵 춤이 있었다"는 사실 조차도 까마득히 잊고 살아가고 있다. 정말 얼마나 웃기는 기이.해괴.엽기의 국민인가.

성희롱이라는 것, 한국의 여성부와 시민단체와 대학의 여학생회가 두 눈에 핏발을 세우고 걸핏하면 거리고 나와 시위하고 대자보를 붙이며 나리법석을 떠는 것, 도대체 뭔가. 그저 약간의 귀에 거슬리는 자음과 모음이 발음되었다는 것 아닌가. 이 음성들은 그저 귓전을 약간 스쳤을 뿐 아무 것도 해치지 않았다. 유별나게 유난을 떨어서 그렇지 "그저 '흥'하고 웃음으로 넘길 수 있는" 것 아닌가. 그 한 마디로 하늘이 무너지나 땅이 꺼지나.

지금 세상 이 땅의 여자들은 매일 매 시각 우리들 남성들을 "성희롱하고" 있지 않나. 나는 정말이지 그렇게 느끼고 살아간다. 그런데 나는 이 나라 여성들이나, 시민단체나, 아니면 가까운 파출소라도 찾아가서 "나 성희롱당했소!"라고 호소할 때가 없다.

요새 드라마에서는 흔히 여자 주인공들이 동년배의 남자 주인공이나 그 아랴 연배의 남성 주인공들의 엉덩이짝을 "톡"하고 치기도 하고 어루반지기도 한다. 나는 그때마다 "저것들이"하고 흥분하지만 남자 주인공은 그저 웃어넘기고 있다. 때로는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더러 "너 나한테 맘 있어?"라고 묻기도 한다. 이거 남자 주인공이 또는 이 시대의 어느 직장의 남성이 여성에게 했다면 "성희롱 당했다"고 고함을 치를 행동이다. 그런데도 사내는 그저 가만히 "당하고만 있다."

나는 서양 풍속을 따라 특별히 야회복 (night gown)을 입어야 할 계제도 아닌데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여자 진행자들이 그 엉크런 어깨를 다 드러내거나 가슴이 드러바 보이는 옷을 입고 있을 때 나는 "성희롱을 당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느낀다.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하면서 핫팬츠를 걸치고 허연 다리를 다 드러낸 여성들에게 나는 "성희롱을 당한다."


순자, 일본에서도 난리를 쳤을까?

순자 (佐川純子)가 이 여자의 조국 일본에서도 그렇게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난리 요란을 떨었을까? 사무라이들이 일본의 거리를 휩쓸고 다녔던 나라, 이 나라 여성들처럼 "드세게 살지도 못했고" 남자들 앞에 공손히 무릎꿇고 앉아야 했고 외출하는 남편의 뒤꼭지를 향해 허리굽혀 "안녕히 다녀오세요!"라고 인사를 올렸던 나라, 기모노를 입고 다니다가 미묘한 시각 미묘한 장소에서 사무라이의 요구가 있으면 응해야 했던 그런 전통을 가졌던 나라에서 온 순자가 왜 대한민국에 와서 저리도 요란스레 핏발선 눈동자를 굴리나,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참으로 해괴망측한 일이다.

그 심리 동기를 하나 따져보면 우선은 KBS라는 멍청한 미디어가 "멍석을 깔았기 때문"이고 남희석이라는 이름의 진행자가 "한국 남성들에게 성희롱당한 경험이 있으면 이야기해 주세요,"라고 공손한 어조로 허리를 굽혀 청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이 해괴한 에피소드는 "멍석을 깐 KBS와 멍청한 진행자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자존하지 않으면 멸시를 당한다

개인으로서나 조직으로서나 그리고 하나의 주권적 독립을 가진 자주 국가로서 그리고 그 국민으로서 우리는 최소한의 자존을 지켜야 한다. 우리는 말하자면 주인이다. 주인은 주인으로서의 자긍심이 있어야지 손님한테 한없이 머리를 조아린다고 좋은 주인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비유하자면, 최근 년 최근 월 또는 최근 일의 이 나라 구성원들의 행태를 보면 예컨대 누가 내 또는 당신 부모나 처 자식이나 형제 자매를 끌고 와서 "이놈 나쁜놈~!"이라고 비난하기만 하면 바로 그 순간 "너는 내 가족이 아니다"라거나 또는 "당신은 내 부모가 아니오"라고 내치고 문을 쾅하고 닫을 태세다. 아니, 지금 우리는 그런 짓을 하면서 살고 있다.

그런 외부의 비난이 있다고 해도 전후 사정도 들어보고 처벌을 하는 경우에도 단계적으로 가벼운 처벌로부터 차츰 무거운 처벌로 옮겨가지는 않고 말하자면 그 자리서 "즉결처분"을 하고 마는 격이다. 이번 순자 (佐川純子) 사건의 경우 그 대학교는 그 당사자 강사를 불러 일차로 경고를 발하면서 정직 몇 개월을 명해도 됐고 감봉 몇 개월 처분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순자 한 마디로 즉결처형을 한" 것이다.

출처 : 아고라 사회방
일자 : 2007-06-29
저자 : 황학산 심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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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램 초기의 신선한 시도를 변질시켜, 단순 신변잡기의 말장난/폭로 쇼프로가
되버린 미녀들의 수다... 바로 그 쇼프로에서 한 일본인의 성희롱 경험 폭로...
그로 인한 한 사람의 매장...
민주주의 사회에서 있어서는 안될 말도 안되는 이런 황당한 일련의 프로세스에,
아무런 비판의식도 갖지 않는, 일부 무분별한 시민들과, 몰지각한 여성단체...
그리고 서둘러 한사람을 잘라버린, 유치한 외국어대학...
이 사건의 결말에 꽤나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내 생각을 정말로 가감없이,
중립적인 입장에서 냉정하게 표현해준 글이다.
내 이런 생각들에 대해서, 일부 개념없는 사람들은 그 강사를 두둔한다고 한다.
머리속에 뇌는 안드로메다로 파견보낸 것일까?...
난 그 강사를 두둔하는게 아니라, 그 강사가 이 사회에서 매장되기까지의 그 일련의 과정들을
비판하는 거다. 우리나라는 여론재판이 발생해서는 안될, 법치국가이니까 말이다.

아고라 사회방은 대부분 쓰잘데기 없는, 비난과 욕설/선동이 태반이지만,
가끔씩 이렇게 멋진 글이 올라오기도 한다.
내가 아고라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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